2021.09.08 새벽

꽤나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딱히 글을 쓸만한 사건이나 감정의 동요도, 그만한 시간도 없었음이 가장 크겠지. 그리고 중간 중간 짧은 조각 글들은 전부 인스타 비계에 올려버려서 그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근데 인스타에 못 올릴만큼 긴 글은 이따금 썼었는데 요샌 진짜 안썼네 사실 해야할 일 많은데 제껴두고 오랜만에 혼자 사색을 즐기는 중이다.

지난 일기를 쭉 보는데 작년의 나는 뭐가 그렇게 아팠나 싶더라. 실제로 그 정도였나 싶지만,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하다는 글을 읽다보면 참, 안쓰러웠다. 울고, 또 울고, 그래도 안돼서 걷고, 또 걷고. 사실 매번 쓰지만 그 땐 그렇게 힘들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그냥 힘들었는데 그 만큼이었는지 몰랐다. 지나고 보니 대견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버텼구나. 무너지지 않고 잘 살았구나. 그래도 지금 이렇게 다시 나를 찾은 걸 보면, 인생이란게 그런 건가 싶다. 세상에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치 +와 -를 오가는 싸인 코싸인 그래프처럼, 힘든 순간도 비교적 괜찮은 순간도, 더 나아가 행복한 순간도 있는게 그게 인생같다. 슬프게도 우리는 그 우울하고 힘든 순간을 피할 수 없고, 애써 외면해도 결국 언젠간 마주해야 한다. 마주하는 일을 미루면 곪는다. 속부터 곪아서, 곪고 또 썩어서, 시간이 흐르면 꺼내기도 싫은 쓰레기가 되어 꺼내기 더욱 어려워진다. 그렇게 곪은 속은 안쪽부터 썩어들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생하기 힘들어지겠지. 그래서 스트레스 관리라는게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 일종의 노폐물 같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어른은 다 이런걸까. 나이를 한 살 씩 먹어가며 머리 속에는 걱정과 생각만 많아지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한 날들을 이겨내야 한다. 버텨내야 한다. 우리 부모님도 그랬겠지. 내 앞에서 수업하고 계신 교수님도 그랬겠지.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도 몰라. 언제쯤 편안해질까, 언제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카페에서 진상짓을 하는 할아버지도, 길거리에 취해 토를 하는 취객도, 그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들도 이렇게 살고 있을까. 이 세상 모든 어른들은 다 이렇게 살아온걸까. 그런거라면, 난 이 사람들이 모두 존경스럽다. 아무리 철없어 보이는 동네 삼촌이라도, 아무생각없이 출퇴근 하며 로봇처럼 살던 이웃집 아저씨도 다 이렇게 생각이 많고 걱정이 많고 힘들게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나는 내가 생각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먹으면 다 그런가봐. 많은 사람들이 삶의 애환을 담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공감한다. 이젠 드라마를 봐도 다르게 보인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다 너무 아파서, 가슴이 저리다. 마냥 웃고 떠드는 작품이 좋다가도, 가끔은 이런 가슴이 저린 작품들을 찾아보곤 한다. 마음이 아파서, 생각이 많아져서 힘들지만 또 한 단계 성장해간다. 지금 나는 매우 행복한 주기에 있는 상태이고 하루하루가 매우 만족스럽지만, 또 과거에 기록해둔 슬픔을 읽고 나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다시 그 때처럼 힘들다면 그 때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매일 매일이 이렇게 행복하기만 하면 참 좋을텐데, 왜 사람은 그러지 못 할까. 그냥 마냥 행복하고 싶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등학생 때가 그럽기도 하다. 돌아보면 그 때도 힘든 순간이, 울던 순간이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렸다 그치.

어제는 참 행복했던 날이다. 물론 짜증이 났던 순간도 있었는데, 하루가 행복하다고 한 번 느끼기 시작하니까 그 일은 참 별게 아닌게 되어버렸다. 결국 안 좋은 감정은 날아가고 행복하다는 감정만이 남았다. 행복했다.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김창완 선생님께서 찌그러진 동그라미들 가운데 제대로 된 동그라미 한 두개만 있어도, 그건 동그라미라고. 찌그러졌다고 동그라미가 아닌게 아니라고. 인생이 참 그래. 그 얼마 안되는 동그라미 몇 개의 기억을 붙잡고 찌그러진 동그라미를 버텨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그라미가 참 좋았어서, 내 인생이 꽤 괜찮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찌그러진 동그라미 조차 나의 일부인걸. 그 동그라미가 있었기에, 그 연습이 있었기에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게 된거야. 너무 하루하루에 집착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흐름을 기억하게 된다. 불행한 순간에 집중하지 말자. 지나고 나면 행복한 순간도 올거야. 그 흐름을 보는거지. 아, 나는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꽤 행복한 날들도 있었구나. 나 참 잘 살았다. 지금 힘들어도 행복한 날이 오겠지. 그 때는 지금을 돌아보며 수고했다고 이야기할거야.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끔찍해서 죽고 싶더라도, 먼 미래의 나는 또 이 순간을 추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루 정도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에도 역시 완벽하군" "비틀거려도 계속 또박또박 똑바르게 걸어"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아이유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나의 삶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요즘은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이 궁금하다. 엄마 아빠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내 나이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언제가 힘들었고 언제가 행복했는지. 21년을 함께 했지만 우린 부모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내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참 회의감이 들었다. 한 명 한 명, 지금 그들의 인생이 어떻든 모두 소중한 자신의 삶이 있었을 텐데, 죽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게 너무 슬펐다. 그래서 자서전을 써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꾸준히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정리해두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뼛속부터 이해하고 품고 싶어졌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근데 난 기록이 참 좋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그런 것들을 기록하면 뭔가 내 분신이 하나 생긴 느낌이다. 내가 그렇다보니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물론 시간적 여유나 여러 현실적 이유로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못하더라도, 부모님의 지난 날들에 대해서는 꼭 기록해두고 기억하고 싶다. 

'흑역사도 나의 역사이다' 이건 그냥 내가 꽂힌 말이다. 누군가는 흑역사를 없애버리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흑역사는 나의 역사이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모든 경험은 교훈을 수반한다고 생각한다. 하다 못해 '이렇게 하면 얻어 맞는구나' 라는 교훈일지라도. 의미 없는 하루는 없고, 의미 없는 하루 안에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하루하루가 모여 미래의 나의 선택을 결정하고, 우리가 너무나도 피해가고 싶었던 힘든 하루하루도 나의 일부가 된다. 의미 없는 하루라는 건 없다. 의미 없는 사람도 없다. 그저 그 존재가 의미이다.